신용공황 막으면 절반의 성공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우리의 노력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은 까닭 모를 두려움뿐이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공황과의 전쟁을 선포할 때 한 말이다. 이번에 두려움의 뇌관을 제거하고 금융신뢰를 되찾는다면 세계경제는 문제의 첫 단추를 나름 잘 꿰는 것이다. 이미 전치 수년의 중상을 입은 금융시스템을 살리는 데 필요한 요령을 80년 전 대공황에서 찾고 있으니 그나마 선조들의 유산이 다행스럽다.
본 사건의 경과보고
이제 막 수술방에 들어간 미국은 아직 마취상태다. 허겁지겁 응급조치(몇몇 큰 금융기관 처리)를 취하고 첫 메스를 대자마자 응급상황이 발생했다. 혈압이 떨어지고(신용경색) 혈액(달러유동성)이 부족하다. 의사는 과다출혈(자본손실)의 쇼크를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유동성을 풀고 있다. 세계각국이 추가헌혈(자금공급)에 합의하는 등 이 세계적 거물환자 살리기에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남의 일이 결코 아니니까.
앞으로 수술이 진전(구제금융 투입)되면서 어떤 돌발사태가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환자는 다소 고령(성숙경제)인데다 체력(경제 펀더멘틀)마저 소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대기환자(유럽)의 상태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이 질환은 세계교역과 실물이라는 경로를 타고 병원 밖 신흥국에 전염되고 있다. 너무 깊은 환부인지라 수술은 길어지고 불확실성이란 이름의 바이러스가 어떤 변종을 일으킬 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역시 예보는 없고 중계방송만
"경제 및 금융시장에 대한 서브프라임 사태여파는 제한적 수준에 그칠 것이다” 지난해 3월 뉴센추리 파이낸셜에 추가대출이 전면 중단된 후 버냉키 FRB의장이 한 말이다. 작년 11월 시티그룹이 아부다비 투자청에서 75억 달러를 꾸고 이후 메릴린치, UBS가 아시아 국부펀드에 관심을 보일 때에도 많은 전문가들은 이를 ‘어이없는 일’로 받아들였다.
올해 1월 미 의회가 1,500억 달러어치 경기부양책에 사인하고 1.25% 포인트의 전격적 금리인하가 단행되자 많은 국내외 전문가들은 일제히 환영하며 이를 ‘침체단축의 시그널’로 봤다. 이어 2월 영국정부가 파산위기의 모기지은행 노던록의 국유화를 발표하고 3월에 미 5대 투자은행 베어스턴스가 JP모건체이스에 인수되고 연방은행이 또 다시 0.75% 포인트의 금리를 내리자 이때도 “이제 금융위기가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컸다면 이 사실을 믿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신문을 펴고 TV를 켜면 온통 금융위기에 관한 얘기뿐이다. 태풍은 이미 상륙해 전답을 할퀴었는데 중계방송의 절반은 태풍의 지나 온 경로를, 그 나머지는 막연한 피해규모와 망연자실해 하는 이재민의 인터뷰뿐이다. 이번에도 역시 예보는 없고 현재시재의 상투적 중계방송뿐이다.
예측은 또 틀릴 것이다
그간 미국 발 금융패닉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실력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예측력을 과연 믿을 수가 있는가? 우리는 그 누구, 그 어디에도 예측의 믿음을 줄 수가 없다. 지난 수년 간 경제전망은 늘 빗나가 왔기에 지금 또 예측이 또 틀린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경제주체의 행태를 연구한 자료(LG경제연구원 나준호, 2007.9)들을 보면 예측이 빗나가는 심리적 함정들이 흥미롭다. 특히 과거에 얽매이는 기억력의 함정은 IMF위기를 겪은 우리를 항상 IMF 시각에 묶어둔다. 또한 대중 속에 묻어가려는 신중함의 함정은 감히 예측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튀어 보려는 용기를 앗아가 버린다. 또한 필자를 비롯한 대다수 전문가들은 많은 현상 중 자기입맛에 맞는 증거를 뽑아 논리를 멋지게 정당화할 뿐, 정작 쓸만한 예측에는 소질이 없다. 이것이 그간 전문가와 언론, 대중이 연합해 예측의 함정에 빠져든 안타까운 이유들이다.
지나친 비관도 낙관도 빗나갈 듯
향후 분석가들은 또 심리적 자기최면과 편향성에 빠질 것이다. 예측세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일반이 짐작하는 것처럼 그다지 쿨하거나 직관적이지 못하다. 금융패닉에 놀란 우리는 아마도 또 다시 비이성적 공포 아니면, 지나친 사태낙관, 이 둘 중의 하나에 빠질 위험이 높다.
공포는 말 그대로 두려움인데 금융과 실물, 미국과 아시아,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 등 동전양면과 같은 변수끼리의 악화가 이를 더욱 부추긴다. 나빠진 금융이 실물을 할퀴고 그로 인해 다시 금융이 무너지는 악순환적 고리를 끊고 절망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현재로선 바로 신속한 양심고백(금융의 부실규모 표출)과 신뢰회복(장부 클린화), 그리고 고독한 실형감수(경기침체)뿐이다.
한편 주가가 조금만 회복되거나 경제지표가 일시 개선될 때 사람들은 안일한 낙관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본사건의 본질은 미국의 뿌리 깊은 구조적 불균형(제로 저축률, 통화 신용팽창, 과잉소비)과 성장을 하려면 너무 많은 자원을 써대야 하는 세계 생산함수의 한계적 속성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 55조 달러의 CDS와 600조 달러의 장외파생상품, 은행들의 유동성 부족, 그리고 감독기관의 태만 등 단순 죄목만으로 수사를 축소한다면 이는 또 다른 위기를 잉태하는 꼴이 될 것이다.
냉정히 볼 때 갈 길은 멀고 험하다
각국 정부의 시장에 대한 무제한 자금공급과 금융기관의 부분 국유화는 일단 엔진이 멈춘 고장 난 자동차를 굴러가게 하는 긴급 구난조치(예금 펀드인출 등 신용공황 억제책)로서는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그 다음 이 삐걱거리는 자동차가 가야 할 길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금융기능이 복구되고 부실이 정리된다 해서 곧 바로 돈이 돌고 경제가 사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재정지출은 당분간 인플레 위협으로 나타날 것이다. 찌그러진 은행자본계정은 그들로 하여금 정상적 금융활동을 위축시킨다. 공격적 통화주입에도 불구, 실물 쪽에서 쌓이는 재고와 실업률 상승, 투자회피는 여전히 경기의 위협요인이다.
죽어야만 다시 사는 세계경제의 딜레마
지금은 세계경제의 약 40%가 G7(선진국)의 소비로 굴러간다. 그러니 중국 등 신흥국의 수출이 무사할 리 없다. 내년까지는 이들의 경기가 더 걱정된다. 밀어내기 수출과 고단한 사업수축과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유가와 집값이 더 떨어져 인플레의 뿌리가 완전히 뽑혀야 비로서 밑 바닥 기초대사량에 의존한 경기회복이 싹트기 마련이다. 각국의 필살기 경기부양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이 때쯤이 될 것이다.
향후 세계경제에 무기력한 초장기 디플레이션(경기침체)이 펼쳐질지, 아니면 일정한 L자형 침체 후 드라마틱한 반전이 나올 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만약 헐값의 요소가격(유가, 금리, 임금)이 내수중심의 중국경제에 조금씩 불을 지핀다면 글로벌 경기순환에는 더 없는 희망이다. 불황의 터널 속에서 세계는 경기의 반전을 만드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막대한 재정적자로 미국 통화가치에 힘이 빠지고 아시아의 자산가격이 매력적인 수준에 도달할 때 세계자본은 또 다시 신흥국으로 강하게 쏠릴 것이다. 결국 세계경제는 적게 소비하고 적게 생산하는 디플레의 고통을 거친 다음에 비로서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다음 회복 사이클을 맞게 될 것이다. 한번 죽어줘야만 다시 살 수 있는 게 지금 세계경제가 지닌 진짜 딜레마이다.
|